[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오늘의 운세 대신, 하느님의 경이로움을 향해 걸어가자”


“미래를 알기 위한 별자리 운세를 보거나 점쟁이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안주하며 움직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고 주님의 경이로움을 향해 열린 여정으로 인도되도록 자신을 맡기는 사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여름 휴가 전 마지막으로 집전한 6월 26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에서 이 같은 요지로 강론했다.

“움직이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정적인 상태로 머물지 않고, “지나치게 안주하지” 않으며,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따르라는 교황의 초대 말씀이다. 제1독서인 창세기(12,1-9)에서 실마리를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브라함의 모습에 대해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인 삶의 방식, 하느님 백성으로서 우리의 삶의 방식”은 세 가지 차원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곧 “옷벗김”, “약속”, “축복”이라고 설명했다. 교황은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 친족, 아버지의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라고 권하셨음을 상기시켰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옷이 벗겨진 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 안에서 완성되는 옷벗김의 차원을 항상 수반합니다. 첫 걸음을 떼기 위해서 늘 ‘가거라’, ‘떠나라’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약간의 기억을 되살린다면 복음에서 제자들의 부르심 또한 ‘가거라’, ‘떠나라’, ‘오너라’는 말로 이뤄졌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언서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밭을 갈고 있던 엘리사를 생각해봅시다. ‘버려두고 오너라’고 했지만,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다녀오너라’ 하자, 그는 갔다가 왔습니다. 항상 ‘떠나서 오너라’라는 양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옷이 벗겨질 “능력”을 갖추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교황은 부언했다. “예수님과 함께 옷벗김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도록” 자신을 맡기지 않는 사람들은 분명히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히브리서(11,8)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 정확한 목적지도 모른 채,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면서, “믿음으로 순종”했다.

“그리스도인은 미래를 알기 위해 운세를 보지 않습니다. 크리스털 구체를 들여다보거나 손금을 보는 점쟁이에게 가지 않습니다 (...)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인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 삶의 첫 번째 차원입니다. 곧, 옷벗김입니다. 그런데 왜 옷벗김입니까? 엄격한 고행주의를 위해서입니까? 아니, 아닙니다! 약속을 향해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두 번째 차원입니다. 우리는 약속을 향해서, 만남을 향해서, 우리가 상속받아야 할 곳을 – 아브라함에게 말했던 땅을 –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집을 짓지 않고, “천막을 쳤다”고 교황은 강조했다. 이것은 그가 “아직 여정 중에 있으면서 하느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주님을 경배하기 위한” 제단을 쌓았다. 그런 다음, “그는 길을 떠났다.” 이것은 그가 “항상 여정 중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 여정은 매일 아침에 시작됩니다. 주님께 자신을 맡기는 여정, 주님의 경이로움에 열려있는 여정, 때로는 좋지 않고, 많은 경우 힘든 – 질병이나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 여정이지만, 주님께서 나를 확실한 장소로, 나를 위해 준비하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열려 있는 여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정 중에 있는 인간, 천막 안에 사는 인간, 영적 천막에서 살고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은 지나치게 체계화되고, 지나치게 안주할 때,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차원을 잃게 됩니다. 약속을 향해 걸어가는 대신에 약속을 옮기고 약속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좋지 않고, 본연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교황은 “우리 가족의 시작이 되는 이 씨앗”에서 그리스도인 삶의 다른 특징, 축복의 차원을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은 “축복하는” 사람이다. 곧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에 대해 좋게 말하고, 다른 이들에 대해서 좋게 말하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하느님과 다른 이들이 축복을 빌어주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 삶”의 도식이다. 우리 모두, 평신도들 “또한” “다른 이들을 축복하고, 다른 이들에 대해 좋게 말하고 하느님께 다른 이들에 대해 좋게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종 우리는 이웃에 대해 “좋게 말하지 않는” 습성이 있다고 교황은 경고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성조” 아브라함에게 “삶의 요약”으로 맡기신 계명을 따르는 대신, “혀가 제멋대로 움직일 때”,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비난할 바 없이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에 의해 “벗겨지도록” 자신을 맡겨드리고,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면서 걸어가야 한다. 결국, 그리스도인 삶은 “그와 같이 단순한 삶”이라고 교황은 강론을 마무리했다.

 








All the contents on this site are copyrighted ©.